일이 꼬일 때마다 ‘회사 탓’을 하면, 결국 내 인생만 꼬이는 구조

솔직히 말해, 당시 내 불만은 틀린 게 없었다.
회사의 시스템은 실제로 엉망이었고, 상사는 무능했으며, 동료들은 이기적이었다. 내가 겪은 부당함은 엄연한 팩트였다.

그래서 나는 당당하게 남 탓을 했다. “환경이 이 모양인데 내가 뭘 더 해?”
나를 ‘피해자’로 규정하는 순간 마음은 편해졌다. 적어도 내가 무능해서 성과가 안 나는 건 아니라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성립됐기 때문이다.

하지만 그 정당한 비난을 계속하는 동안, 정작 내 커리어는 썩어가고 있었다.
회사가 나빠서 욕을 했을 뿐인데, 결과적으로 내 인생만 꼬이는 이상한 구조였다.

내 기분의 리모컨을 상사에게 쥐여주다

당시 나는 아침에 출근해서 상사의 표정부터 살폈다. 그가 기분이 나빠 보이면 내 하루도 망쳤고, 그가 웃으면 안도했다. 내가 그토록 경멸하던 상사에게, 아이러니하게도 내 하루 기분을 결정할 ‘전권’을 넘겨주고 있었던 것이다.

“저 사람 때문에 일을 못 해”라는 말은, 뒤집어 보면 “내 성과는 전적으로 저 사람 손에 달려있습니다”라고 인정하는 꼴이었다.

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,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‘외부 통제 소재(External Locus of Control)’라고 부른다. 내 인생의 주도권이 나에게 없고 타인에게 있다고 믿는 것인데, 딱 내 꼴이었다. 나는 저항하고 있다고 믿었지만, 사실은 그들에게 종속되어 있었다.

옳은 말을 하면서 내 태도는 망가진다

피해자 포지션이 위험한 이유는 ‘방치’를 합리화하기 때문이다. 회사가 엉망이라는 사실이 “그러니까 굳이 애쓰지 않아도 돼”라는 태도의 근거가 되었다.

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 대신, “이래서 안 돼”라는 보고서만 머릿속으로 쓰고 있었다. 환경을 탓하는 동안 나는 내 성장을 멈춰둔 채 내버려 두었다.

회사가 나쁜 것은 그들의 잘못이지만, 그 핑계로 내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온전히 내 손해였다. 나는 억울하다는 이유로 내 삶을 방치하고 있었다.

책임은 용서가 아니라 ‘주권 회복’이다

어느 순간 나는 질문을 바꿨다. “누가 문제인가?”에서 “이 쓰레기 같은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?”로.

이것은 회사의 잘못을 용서하거나 내 탓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. 통제의 소재를 ‘바꿀 수 없는 외부(상수)’에서 ‘움직일 수 있는 내부(변수)’로 가져오겠다는 선언이다.

내가 할 수 있는 작은 행동 하나를 찾을 때, 비로소 나는 상황에 끌려다니는 피해자가 아니라 상황을 다루는 플레이어가 되었다. 상황은 여전히 나쁠지라도, 적어도 내 기분을 그들에게 허락받지는 않게 된 것이다.

“나는 지금 환경을 탓하며 기다리는 중인가,
아니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는가?”

탓을 멈추는 순간, 주도권이 내 손으로 돌아온다.

한줄 기준 요약

남 탓은 나를 보호하는 방패가 아니라, 내 인생의 통제권을 타인에게 넘겨주는 ‘권한 위임장’이다.